일본, 조선교육 말살정책

조선의 서당 폐원

조선인 '우민화 정책'

양주동 박사 '조선의 맥박'

김태봉 기자

작성 2020.09.13 13:18 수정 2020.09.19 14:10

 

1913년 한 마을에 모집글이 나붙었다.

학생 모집

 

다음날

서당 안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맑고 진지한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조선의 맥박

19118월 일본의 <조선교육령> 발표

교육은 충성스럽고 선량한 국민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다.

-1차 조선교육령 제2

 

보통의 지식,기술을 가르치고 일본어 보급을 목적으로한다.

-1차 조선교육령 제5

 

조선 보통학교 교실로 칼을 차고 교단에 오른 일본 교사들의 목표는 단지, 조선인이 보통학교만을 졸업하고 곧바로 노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바로 조선인 우민(愚民)화 정책 일명 바보교육 이었다.

 

이로인해 전국 곳곳에서는 서당 열풍이 불어닥친것이었다.

1911년부터 6년사이 서당의 수 16,540개에서 25,831개로 급증했으며, 또한

1911년부터 6년사이 서당의 학생 수는 141,604명에서 259,513명으로 급증했다.

 

당시 초등교육 대상 학생의 약70%에 대해서 일본의 교육통제와 함께 보통학교 입학을 강요했지만 서당열풍은 멈추지않았다.

 

전국에 서당이 25천여 개가 넘고 학생들이 30만명을 초과하고 있다.”

-동아일보 192154

 

이렇게되자 결국 일본의 서당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 경찰과 교사들이 서당을 급습하여, 학생들을 강제로 끌고와 감금하고 보통학교에 입학할 것을 강요하였다.

 

훈장들은 학생들을 숲속에 숨게하고 인원과 연령을 속여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타오른 조선인의 교육열은 그치지않았다.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훈장으로 나섰고, 우리의 글과 역사,민족의식 독립의 의지를 가르쳤다.

전국 곳곳에 뿌리내린 조선의 서당은 3.1만세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19182

일본은 <서당에 관한 규칙> 발표했는데,

일본은 기존의 서당을 폐교시키고 새로운 서당 설립을 억제한다.

 

이로인해 1930년대 이후 조선의 서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튼튼한 젊은이들, 어린 학생들...

그들의 빛나는 얼굴...

아아 이야말로 참으로

조선의 산 맥박(脈搏)이 아닌가

아아 조선의 대동맥,조선의 폐()

아기야,너에게만 있도다

-양주동 조선의 맥박

 

*양주동 박사

197774살 되던 해 2월 타계

 

1903년 개성에서 태어나 신동 소리를 듣고 성장한 양박사는 스스로 <국보>라는 별칭을 즐겨 사용했다. 원래는 6.25 전쟁 때 동아일보 사장실에서 만난 마라토너 손기정 씨가 모두 피난을 가고 국보들만 남아 있다니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양박사에게 말을 건넸던 것에서 <국보>란 말이 유래됐다. 그로부터 양박사는 공개된 자리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국보로 칭했다. 그런데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국보 양주동> 칭호에 반감을 갖지 않고 사실상 인정을 하고 살았다는 점에서 양박사는 특별한 인물이었다.

 

일본 와세다대에서 공부한 양박사가 국문학자로 국내 학계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7년 향가(鄕歌)와 관련된 일본 학자의 해석을 통렬히 비판한 <향가의 해독>이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였다. 그는 5살 때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고 어릴 때 이미 중국 당송(唐宋) 8대가의 글을 통달한 천재로 소문이 났다. 기억력도 비상해 경신학교 교사 시절에는 출석부를 보지 않고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호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국문학계의 큰 별이었던 양주동 박사는 어려서는 신동, 젊어서는 기재(奇才), 노년기에는 <인간 국보>라는 소리를 들으며 소탈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일생을 살았다.

 

감수 : 김태웅 성루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참고 : 서해문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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